[문형봉 칼럼] 장수의 시대, 축복을 설계하지 않으면 재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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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이후 선진국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를 경험한 일본은, 누구보다 먼저 이 문제가 단순한 인구통계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조를 흔드는 위기라는 사실을 자각한 나라다. 일본은 2012년 전체 인구의 23.3%가 65세 이상이 되며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고, 최근에는 그 비율이 30%에 육박하며 인류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시대의 최전선에 서 있다. 아시아 동쪽의 이 섬나라는 그렇게 인류의 미래를 앞당겨 보여주고 있었다.
1980년대 일본 사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풍요롭고 안정적이었다. 국민의식은 보수화되었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은 정치적 동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미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일본은 평균수명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하며, 고령자의 질병과 빈곤, 고독이라는 새로운 사회문제에 직면했다. 오래 사는 사회는 곧 준비되지 않은 사회의 민낯을 드러냈다.
이에 일본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고령사회대책기본법’을 비롯한 관련 법률을 제·개정하고 공적연금 제도를 정비해왔다. 2000년 4월에는 간병이 필요한 사람이 사회적 보험을 통해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한 ‘개호보험제도(介護保険制度)’를 도입하며, 가족 중심 돌봄에서 사회적 책임으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이는 고령화에 대한 일본식 해법의 출발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는 이제 아이는 줄고 노인은 늘어나며, 노인은 쉽게 죽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문제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에 있다.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노년의 삶이 행복해야 한다. 건강해야 하고, 사회와 연결되어 있으며, 여전히 가치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독거노인이 늘어나고 고독사로 생을 마감하는 사회라면 장수는 결코 축복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일본이 먼저 초고령사회를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불행이 아니라 학습의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 일본의 시니어 트렌드는 곧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이미 고령화의 급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우리나라는 2000년에 유엔이 규정한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고, 불과 20여 년 만에 고령사회와 초고령사회를 연달아 통과했다. 최근에는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를 넘어서며 명실상부한 초고령사회가 되었다. 평균수명 또한 꾸준히 늘어나 이제 노년층이 사회의 주요 인구집단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와 같은 추세가 지속된다면, 2050년경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노인 인구 비율을 가진 국가 중 하나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현실을 마치 밀려오는 운명처럼 외면한다면, 다가올 미래는 재앙에 가깝다.
“고령화 사회가 올 줄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을 도리는 없었다.”
일본의 경제학자들이 고령화 문제를 이야기할 때 반복해온 말이다.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우리의 대응은 일본보다 더 늦고 더 조심스럽다. 한국과 일본의 인구구조 변화 시차는 10~15년에 불과하지만, 제도 도입과 사회적 합의는 15~20년 이상 뒤처져 있다. 일본조차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실패까지 반복할 여유가 없다. 특히 고령층을 단순한 보호 대상이나 복지 수혜자로만 설정하는 정책의 악순환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고령화 문제는 노인복지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노인요양시설을 늘리고 돌봄 서비스를 확충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들며, 그 부담을 전적으로 젊은 세대에게 전가하는 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이제 노인은 부양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세대 간 이전만으로 사회를 유지하던 시대는 이미 끝나가고 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사실은 노인은 도시를 떠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청·장년 시절을 도시에서 보내며 도시와 함께 나이 든 사람들에게, 수십 년 전 떠나온 고향보다 현재 살아온 도시가 더 안전하고 익숙한 공간이다. 고령화를 먼저 경험한 복지 선진국들은 노인이 자신이 살아온 지역과 집, 이웃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채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에이징 인 플레이스(Aging in Place)’를 노인복지 정책의 핵심 가치로 삼고 있다. 이는 복지 지출을 넘어, 도시 재생과 지역 경제 활성화, 새로운 일자리 창출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전략이다.
산업화와 도시화, 핵가족화로 사회 환경은 이미 크게 변했다. 이에 따라 경로효친 사상이나 자녀의 부양 책임에 대한 인식 역시 달라지고 있다. 이 변화의 흐름을 거스르기보다, 그 안에서 새로운 노년의 역할과 삶의 방식을 설계해야 한다. 변화에 적응하고, 사회와 연결된 노년이야말로 장수가 축복이 되는 길이며,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가장 지속 가능한 미래일 것이다.
문형봉 기자 mhb042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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